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단 편집) === 소수민족 탄압, 반대파 숙청 === >튀르키예 민족이 아닌 자들은 오직 한가지 권리만을 가지고 있다. [[내셔널리즘 #s-6|노예로 복무할 권리]]이다. 적과 친구, 심지어 [[아라라트 산|쿠르드족들이 살고있는 산]]조차 이를 알고있다. > 대표적인 아타튀르크의 강경 진압으로 지목되는 사건은 1937년 데르심 반란의 수습과정이다. 데르심 반란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1차는 1937년 3월 20일부터 11월 말까지. 2차는 1938년 1월 2일부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의 원인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데르심(Dersim, 현 지명은 툰젤리 Tunceli) 도의 토착 부족장들이 부족민들을 모아 저항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지방행정은 도시에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지만, 향촌은 대체로 현지 부족장 혹은 공동체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좋게 말하자면 지방자치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정부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이후 지방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데르심 지역의 경우 [[알레비파]] [[자자족]]과 수니파 [[쿠르드족]],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때 생존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튀르키예정부는 공개처형과 '''공중폭격'''까지 동원해가며 이를 진압했다.[* 툰젤리 도의 행정자료를 보면 이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1935년에 시행된 인구조사에서 툰젤리 도 전체 인구수가 101,099명, 194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체 인구수는 94,639명으로 집계되어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의 인구조사는 매우 철저해서 인구조사 기간 동안에는 지방의 경우 외출조차도 철저하게 통제해서 조사했다.] 당시 튀르키예 공화국은 지방토착세력을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실제로 1925년 남동부 튀르키예에서 오스만 복고운동이 터져 곤란에 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을 무력으로 누르려 했다. 이때 희생된 숫자는 반란군 6,000여 명을 포함해 민간인 13,806명(튀르키예국회 공식추산)에서 40,000여 명(데이비드 맥도웰 추산)에 달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에 속한 민간인 11,818명은 이후 튀르키예 전국에 분산이주 조치되었고, 도 이름도 툰젤리(Tunceli)로 바꾸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근대 이후 5번째로 규모가 큰 학살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이 운동은 아르메니아인 300만 중 100만 ~ 200만을 학살(아르메니아 주장)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축이라는 내용의 주장이다.[* 튀르크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제국이 있던 18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왔기 때문에 온전히 아타튀르크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애매하다.] 가령 1921년, 튀르키예 독립군은 마라시(Maraş)에 주둔해있던 프랑스군 5000명을 3만으로 공격한 다음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이었던 마라시 시민 1만 명을 학살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돈과 프랑스에 협조한 병사 200명을 넘겨줬는데도 반란 위험이 있단 이유만으로 학살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마라시가 프랑스군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독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승인하기도 했고 장티푸스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타튀르크의 치세 중에 활성중지되지 않은 [[티푸스]] 백신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뿌렸다고 고백한 의사도 있다. 생물학을 좀 배웠으면 알겠지만, 이건 그냥 '''티푸스'''를 뿌린 학살이다. 그 밖에도 발칸과 아나톨리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 명사들을 암살사주한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호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관한 것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과 마라시 학살 역시 그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측에 붙어 자신들의 옛날에 영토였던 역사적 영토를 되찾고 그곳의 튀르크인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에 붙을 경우 당장 국가 존재 자체가 위협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는지는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서를 볼 것.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정확히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타튀르크가 그 사건에 얼마나 책임이 있느냐'''의 문제인데, 튀르키예 측에서 반론으로 나오는 의견에는 1910년대에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세력에 있어서도 끗발조차도 날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청년 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가 집권하고 있었고,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 4월 23일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 등을 만나고 술탄 정부에 반란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아타튀르크가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감독관 자격으로 1919년 11월 9일에 [[카이세리]]를 방문하고 한 연설을 참고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타튀르크의 성향은 민족주의보다는 이슬람을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부순 것은 1920년 초 이스탄불을 방문한 이후부터라는 반론도 있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책임을 아타튀르크에게 더 크게 강조하려고 죄다 덮어씌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시리아-이라크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항목에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 아타튀르크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즉,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사항이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아타튀르크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튀르키예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왜곡으로 증거도 없이 그렇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세브르 조약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엔베르같이 해외로 망명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살자들을 중용했다. 즉, 총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에 대한 본인의 개인적인 책임은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를 아무런 처벌이나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간 것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학살 자체를 덮으려 한 책임이 있다. 쿠르드족[* 정확하게 말하면 PKK와 의견을 같이하는 쿠르드 분리주의자들.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튀르키예에 속하며 PKK에 동조하지 않고 살고 있다. 오히려 PKK 때문에 자신들까지 잠재적인 반란자로 몰린다며 불쾌해하는 쿠르드들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나 지금의 북한을 떠올려보자. 1930년의 한반도 시민 대다수나 지금 북한의 주민들은 부자유와 부조리를 인지하고도 그냥 살고 있었다.]에게는 증오를 받고 있는 게 당연하다. 쿠르드인들이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개버린 것도 아타튀르크 정권 때 벌어졌던 일이다. 데르심 학살에 대해서는 2011년 11월 23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당시 튀르키예 총리[* 2014년 튀르키예 대통령이 되었다.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 소속이며, 아니나다를까 집권하고 반세속(케말)주의 정책으로 시끌벅적하다.]가 데르심에서 사망한 13,806명의 민간인에게 '''"만약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Eğer devlet adına özür dilenecekse, böyle bir literatür varsa ben özür dilerim, diliyorum)라고 [[http://www.radikal.com.tr/yazarlar/cengiz_candar/basbakan_dersimle_resmi_tarihi_yirtti-1070465|사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11년 튀르키예 대법원에서는 데르심 학살을 인종을 구별하여 학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경 진압의 기소에 대한 판결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르메니아 측 주장이 과장된 면이 있고 튀르크인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반대되는 사료나 아르메니아 측에서 한 학살에 대한 증거를 들며 반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정당방어로 볼 명분마저 있으니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